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일본에는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는 [[할복]]해 책임을 진다는 개념이 중세부터 정착해 있었다. 따라서 1945년 [[일본 제국]]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한 후 [[고관대작]]과 장성 상당수가 자결했다. 그해 8월 15일 하시다 구니히코 문부대신, 시노즈카 요시오 군사참의관, [[아나미 고레치카]] 육군대신 등이 목숨을 끊었고 [[우가키 마토메]]도 [[카미카제]]를 감행했다. 일본 국민들은 이런 소식을 듣고 전시수상이었던 도조에게도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고 목숨을 끊으라고 요구했고 심지어 좌관급 장교가 귀국 후 도조를 예방하여 패전 책임을 지고 자결하라고 하였다. 하지만 도조는 미군의 향후 행보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편이 나으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거부했다. 9월 초에 항공기술자로 일하던 차남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일가족이 다 같이 자살하자고 권했지만 도조는 젊은이들은 향후 조국의 재건을 위해 일해야 하니 죽어선 안 되고 3년 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그때 죽으라고 만류한 뒤 자신도 자살하지 않았다. 당시 독일에서는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. 도조는 독일의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자신이 전범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. 8월 30일에 [[더글러스 맥아더|맥아더]] 장군이 일본에 도착하고 9월 2일 [[일본의 항복]] 조인식이 시행되었다. 맥아더가 나타난 후 일본 국민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도조를 저주하며 빨리 죽으라고 비난했다. 당시 도조의 집에는 투서가 엄청나게 쏟아졌는데 투서에서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일본인들은 도조의 세 자식 중 누구도 죽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꼬집으며 도조가 권력을 써서 아들들을 살린 것이 틀림없다고 타매했다. 도조는 이러한 주장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. 도조의 장남은 [[만주국]]의 경찰로 일했고 차남은 항공기 기술자라서 징병 대상이 아니었으며 삼남은 육사 생도였기 때문에 도조가 빽을 써서 아들들을 살렸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.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연합군이 점령작업을 시작하자 [[시게미츠 마모루]] 외무대신이 도조에게 조만간 연합군이 전범들을 체포할 텐데 도조는 그 명단 첫 머리에 있다고 알려주었다. 도조는 [[베니토 무솔리니|무솔리니]]의 참혹한 죽음을 떠올리고 만약 연합군이 자신을 일반 범죄자처럼 체포한다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<전진훈>에 따라 죽겠다고 결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